[540]
■ 날짜: 2024.6.1 (토)
■ 동행자: 나홀로
■ 산있는 곳: 慶南 山淸郡 矢川面
■ 산행시간: 07시 48분~15시 43분 (7시간 55분)
■ 날씨: 맑음 (시계 좋음)
■ 기온: 17도~25도

금일 트랭글 궤적
■ 최저고도-466m
■ 최고고도-1915m
■ 누적고도-0m(트랭글 오류)
■ 소모열량-1584kcal
■ 총거리-13.54km

국제신문 지도 - 순두류탐방로입구 → 법계사 → 천왕봉 → 제석봉 → 장터목대피소 → 유암폭포 → 칼바위 → 중산리 버스종점
지리산[智異山] 1915.4m →위치 : 전북 남원시, 전남구례군, 경남 산청군·함양군·하동군에 걸쳐 있는 산 지리산의 산세는 유순하나 산역(山域)의 둘레가 800여 리에 달한다. 이 산은 총면적이 440.4㎢이며, 전북특별자치도에 107.7㎢, 전라남도에 87.9㎢, 경상남도에 244.7㎢ 분포한다. 주능선 방향은 서남서∼동북동으로,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 1,915m)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칠선봉(七仙峰, 1,576m) · 덕평봉(德坪峰, 1,522m) · 명선봉(明善峰, 1,586m) · 토끼봉(1,534m) · 반야봉(般若峰, 1,732m) · 노고단(老姑壇, 1,507m) 등이, 동쪽으로는 중봉(1,875m) · 하봉(1,781m) · 싸리봉(1,640m) 등이 이어진다. 또 주능선과 거의 수직 방향으로 발달한 가지능선은 700∼1,300m의 고도를 나타내며, 종석대(鐘石臺, 1,356m)에서 북으로 고리봉(1,248m) · 만복대(萬福臺, 1,433m) 등의 연봉이 나타난다. 이 산에서 발원한 낙동강과 섬진강 지류들의 강력한 침식작용으로 계곡은 깊은 협곡으로 되고 산지 정상부는 둥근 모양을 나타내는 험준한 산세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들 계곡이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산지의 주변에는 동쪽에 산청, 남쪽에 하동 · 광양, 서쪽에 구례, 북쪽에 남원 · 함양 등의 도시와 계곡에 마을이 발달하고 있어 원상(圓狀)을 이룬다. 지리산에는 이칭(異稱)과 별칭(別稱)이 많다. 한자로는 지이산(智異山)이라 쓰지만 읽기는 지리산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리산을 그 음대로 지리산(地理山)이라 쓴 기록도 많다. 원래 ‘智異’는 지리라는 우리말의 음사(音寫)일 뿐이며 지리는 산을 뜻하는 ‘두래’에서 나온 이름이다. 두래는 ᄃᆞᆯ(달)의 분음(分音)으로서 ‘두리’ · ‘두류’ 등으로 변음하여 ‘頭流’ · ‘豆流’ · ‘頭留’ · ‘斗星’ · ‘斗流’ 등으로 한자를 붙여 지명이 된 것이 많다. 이 중 두류(頭流)는 백두산의 맥세(脈勢)가 흘러내려서 이루어진 산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러한 지리산(地理山) · 두류산(頭流山) 등이 지리산의 이칭이다. -이하 생략- |
산행기
오늘의 산행지는 지리산이다. 지리산!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산이 아닌가! 우리 부부가 지리산에 처음 올랐던 날이 2003년 8월 10일이니 어언 21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그날 이후 우리 부부는 지리산에 끌려 지리산을 내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그중 2003년 8월 31일 지리산 왼골 산행은 우리 부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주었는데 초보 산꾼 부부 두 사람 만으로는 결코 가서는 안 되는 위험한 코스였다. (원 계획은 피아골~왕시루봉 코스였지만 결과는 피아골~토끼봉~왼골 코스였다.)
그 산행기 덕분에 졸지에 나는 한국의 산하에서 제법 알아주는 필자가 되었다. (산행기의 제목은 거대한 함정이었으며 당시에 타이타닉 배경음악을 넣어 더욱 애잔하고 실감 있는 느낌을 주어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다.) 마지막 날머리 지리산 의신마을 하산길에서 아내와 부둥켜 울었던 그날 이후 다시는 금지구역 산행을 하지 않겠다며 다짐하였으나 그 다짐은 작심삼일이 되었고 지리폐인들이 늘 그러하듯 산행급수가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비지정 매니어가 되어갔던 것이다.
잊지 못하는 지리산행 몇 편을 소개하자면 2004년 3월 1일-2일 이틀에 걸쳐서 했던 우리 부부 둘 만의 지리산 종주 (성삼재~대원사) 2005년 6월 5일 윤도균 형님과 아내 셋이서 했던 지리산 당일 종주(성삼재~천왕봉~중봉~마야계곡~순두류) 2005년 9월 4일 우리 부부 둘 만의 최초의 칠선계곡 산행 2005년 10월 16일 우리 부부 둘 만의 황금능선 산행 2006년 1월 8일 우리 부부 둘 만의 일출봉-도장골 산행 (죽음의 공포까지 느낀 산행) 등등 참으로 많은 지리산 골짝골짝을 헤집고 다녔던 것이다.
이렇게 한때는 지리산꾼이었던 내가 이제는 착한 산님이 되어 지리산 정등코스, 그것도 중산리 탐방지원센터가 아닌 순두류탐방로 입구에서 시작하려는 것이다. (아! 옛날이여~~) 금요일 저녁, 내일 지리산 산행을 위해 평소 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늙어서 그런지 4시 46분. 눈이 자동으로 떠져 5시경 곤히 자는 아내를 깨워 아침을 준비케 하고 조식 후 5시 40분 차 두 대를 몰고 (아내는 아내 대로, 나는 나대로) 충무김밥 2인분을 사서 아내와 나누고 6시 2분 통영을 출발, 중산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7시 15분이다.

중산리 주차장에서 바라본 상봉
이곳에 도착하니 진입금지라는 바리케이트가 보이고 주차요원 두 분이 나타나더니 이곳 갓길에 차를 대라고 한다. 알고 봤더니 중산리 탐방지원센터 주차장 보수 공사중이라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작년 부터 공사 중이라 함) 이곳에서 탐방지원센터까지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오르막길이라 산행도 하기 전에 지칠 것이 뻔해 7시 25분. 택시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4명이 합승해서 올라감. 택시비 2,000원) 그리고 탐방지원센터에서 7시 31분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셔틀버스비 2,000원 셔틀버스는 시간에 관계 없이 손님이 차면 출발함) 7분쯤 걸려 순두류 탐방로 입구에 도착하니 7시 46분이다.

순두류 탐방로 입구 (정확한 고도는 알 수 없지만 상당한 고도를 치고 올랐다. 고도가 최소 900m는 될 듯) 지리산 법계사 표석과 오른쪽에 악천후 속에 조난자를 구조해 헬기로 후송하다 추락한 소방대원을 기리는 위령비가 있다. 로타리대피소 2.7km 법계사 2.8km를 거쳐 가는 이번 산행의 들머리다.

생태탐방로 입구에서 함께 순두류를 출발하여 똑 같은 코스로 내려온 젊은 부부의 모습이다. 이 부부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천왕봉까지 함께 올랐는데 나중에 산행 종점인 중산리 주차장에서도 같은 시간에 내려와 신기해서 잠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생태탐방로 출입문과 탐방객 계수대를 통과해 돌계단을 오른다. 출렁다리를 두 번 건너 약 28분 후인 8시 23분 아리랑고개에서 처음으로 물도 마시며 쉬어간다. (순두류 1.7km 법계사 1.1km)

산길은 잠시 계곡과 만났다 헤어져 8시 32분 광덕사교를 건너 덱 계단으로 오른다. 광덕사교에서 23분 만에 해발 1335m 높이의 로타리대피소 앞 삼거리에 닿는다. (로타리대피소 명칭은 부산 로타리클럽의 후원 아래 부산 산악인들이 모든 건축 자재를 등짐을 져 날라 지은데서 유래한다) 로타리대피소 역시 공사중이라 포크레인이 보이고 장막을 쳐 놓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대신 로타리대피소 앞 삼거리에 간이 화장실을 만들어 놓았다. 잠시 들러 요강을 비우고

법계사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샘터에서 목을 축인 후

21년 전 딱 한번 들렀던 법계사를 시간이 좀 넉넉해 들렀다 가기로 한다. 그동안 몇 번을 이곳을 스쳐 지나갔지만 일주문만 찍고 무어 그리 바쁜지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그런데 21년 전 그날 아내와 분명히 법계사에 들렀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마치 처음 온 느낌이다. 법계사로 올라가는 길에는 노란 피나물이 피어있다.
『법계사가 안개구름 사이로 보이고 그 아래에 로타리대피소가 있다. 법계사로 들어가 대웅전을 찾으니 대웅전은 보이지 않고 적멸보궁이란 현액이 걸린 법당에서 한 스님의 낭낭한 불경소리와 함께 목탁소리도 들린다. 안을 슬며시 들여다 보니 당연히 계셔야할 부처님은 간곳이 없고 부처님이 계셔야할 공간에는 유리로 되어있어 바깥에 있는 바위만 보였다. 아내는 주머니에 있는 돈 전부(동전까지 해도 만 원도 안 되지만)를 시주하고 온다.--아들 입시 때문』 -나의 첫 지리산 산행기에서

고도 1,450m 높이에 들어선 법계사는 현존하는 절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신라 진흥왕 5년 (544년) 연기조사가 창건했다. 일제강점기에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속설에 지리산과 법계사의 혈맥을 끊는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이를 뽑아내 전시 중이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고려시대의 석탑이 있어 적멸보궁으로 불린다.


적멸보궁에서 올려다본 산신각 (산신각 앞 삼층석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보물 제 473호


뒤에 여자 산객이 나와 함께 오른 젊은 부부산객이다. 아리랑고개 지나 오름길에서 나에게 추월 당했는데 내가 법계사를 다녀오는 바람에 함께 오르게 되었다.

일주문을 나와 천왕봉으로 덱계단을 오른다. 바위를 타는 된비알에는 덱계단과 철계단이 놓였고 안전 쉼터인 심장안전센터도 지난다. 오름길에서 젊은 공단직원이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옛날 비지정매니어 때는 절대로 만나지 말아야할 사람인데 오늘은 사정이 다르다. (이 젊은 공단직원은 나를 추월하더니 나중에 천왕봉 정상에서 만나게 된다. 고맙게도 그는 일일이 천왕봉에 오른 산님들의 인증사진을 찍어 주었다.)

법계사에서 약 1시간 정도 올라오니 10시 2분. 기립한 바위가 나타나는데 해발 1,700m의 개선문이다. 원래는 바위 두 개가 비슷한 높이로 있었으나 한 개가 붕괴되었다. 21년 전 이곳에서 아내와 함께 충무김밥으로 점심을 먹었던 곳이다. 21년 전 나보다 더 산을 잘 탔던 아내였는데 이제는 이런 힘든 산행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른쪽 반백의 산객과 그의 아내(노란색 배낭)가 보이는데 아내를 개선문 이정표 앞에 서게 하더니 인증사진을 찍으며 "장하다. ㅇㅇ" 하며 칭찬을 한다. 이분들의 나이는 얼마쯤 되셨을까?

고도를 높이니 뼈대만 앙상한 구상나무 고사목이 보이고

곡점능선~일출봉능선~남부능선~멀리 광양 백운산 능선이 줄줄이 이어진다.

2007년 5월 27일 곡점능선에서
곡점능선은 2007년 5월 27일 아내와 둘이서 올라 청래골로 내려왔는데 얼마나 산죽이 험하던지 산행기 제목 마저 "숨막히는 산죽속에서" 였다. 그날 얼마나 기진맥진 했던지 목소리까지 코맹맹이 소리가 되어 "당신 목소리가 왜 이래요?" 하며 아내가 놀래기도 했다.

2007년 7월 22일 수곡골로 올라온 후 한벗샘 갈림삼거리길에서 우연히 만난 대구 산앙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찍은 창고사진이다. 제일이 우측이 송삼목(宋森木)님으로 나무 木이 이름자에 다 들어 있는 지리산꾼이다.(촬영: 아내)
남부능선에 대한 추억도 참 많은데 그중 잊을 수 없는 산행은 2007년 7월 22일 수곡골/용추골 산행이다. 수곡골로 올라 남부능선에서 용추골로 떨어진 후 용추폭포 지나 길을 잃는 바람에 무려 1시간 14분 동안 사투를 벌이며 조난 일보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단천골 들머리로 빠져나온 시각은 20시 12분, 사위는 이미 어둠에 싸인 뒤였다.

개선문에서 23분 정도 올라오니 10시 25분. 천왕샘 하단 쉼터로 올라선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곳에서도 젊은 부부산님이 모델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먼저 천왕봉으로 오르고 나는 목도 축이고 아내가 배낭에 넣어준 떡 한 개를 먹으며 잠시 쉬었다 간다.)

천왕샘 하단 쉼터에서 5배 줌으로 당긴 상봉에는 많은 산님들이 보인다.


천왕샘 (석간수가 흘러 나오고 있는데 모두들 소 닭 보듯 지나간다.)

천왕샘을 통과하면 가파른 철계단이 놓였다. 오름길에는 붉은병꽃이 피어있고

초등학교 4학년 (우리 손자 보다 1살 많은) 남자 아이가 부모와 함께 천왕봉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 나중에 보니 5학년 짜리도 있었다. 이 아이는 아까 된비알 오름길에서는 울상을 짓더니 오히려 지금은 더 잘 오르고 있다.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은 나이가 좀 들어 보였는데 늦둥이인지? 암튼 이런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가 참으로 대단하다. (남자분은 스틱 대신에 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하늘계단이라 불리는 덱 계단이 정상 직전까지 이어진다.


11시 2분 정상에 올라섰다. (아까 오름길에서 먼저 올라갔던 젊은 공단직원이 찍어 주었다.) 줄을 서서 약 15분 정도 기다렸으니 10시 47분 정도 정상에 도착했을 것이다. 고로 개선문에서 약 45분 정도 걸린 셈이다. 2003년 한국나이 49살에 난생 처음으로 천왕봉 정상에 올랐을 때의 그 감동 만큼은 아니지만 한국나이 70살에 천왕봉 정상을 올랐다는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지금 마음 같으면 앞으로 10년 후 80살에도 천왕봉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런지..

내려온 후 뒤돌아본 천왕봉

사태의 상흔이 뚜렷한 중봉이다. 저 동부능선에 대한 추억도 참 많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2012년 8월 19일 영랑대에서 우연히 만난 지사모99회원인 광주의 설까치님과 남원의 오로라님 창고 사진 (촬영: 아내)
2012년 8월 19일 아내와 나 둘이서 했던 향운대/허공달골 산행이다. 향운대를 거쳐 동부능선에서 길도 없는 허공달골을 치고 내려오면서 생고생했던 것과 마지막 아무도 없는 어름터 계곡에서 아내와 둘이서 얼음물에 알탕을 하며 모든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리며 지리산신께 무탈 산행을 감사드렸던 그날의 추억이다.


구름이 춤을 추고 있다. 마치 천왕봉 등정을 축하라도 해 주는 듯이 인생사도 그렇듯이 산도 마찬가지다. 고진감래라! 이제는 아름다운 그림 감상에 몰두한다.

전방에 아름다운 구상나무들과 둥그스럼한 제석봉이 보인다. 정상부에는 없었던 (있었는데 내가 몰랐을 수도) 통신탑도 보인다.

덱 계단길이 끝나는 지점에 피어있는 '붉은병꽃나무' 이다. 지금 지리산 정상부에 가장 많이 피어 있는 꽃이다. 철쭉도 간간이 보였으나 끝물이고 산오이풀은 이파리만 보인다.



칠선계곡 상단 쉼터를 지나 15분이면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는 통천문을 빠져나간다.

통천문을 빠져나온 후 좌측 (등산로 아님)으로 들어오면 도깨비 바위를 만날 수 있다. (무심결에 지나가면 결코 볼 수 없는 바위다)

마지막 끝물의 철쭉의 모습이다. 이리로 내려가면 통신골로 이어질 것이다. 통신골에 대한 추억도 있다. 2006년 10월 29일 카페회원이신 이원호님 솔바우님 난테아우 부부 그리고 우리부부 6인이 유암폭포(50m 상단 두 갈레 계곡 중 우측 계곡)에서 통신골로 올라와 천왕봉을 등정했던 것이다.

2006년 10월 29일 통신골 산행 창고 사진 (내가 촬영했기에 나만 빠짐) 18년 전이라 이때는 나도 아내도 젊었다. 통신골로 해서 천왕봉으로 올라 촛대봉까지 가서 청학연못 보고 시루봉에서 도장골로 떨어져 길상암에서 산행을 종료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산행이었다. (산행거리 18.6km 산행시간 11시간 44분)

하얀꽃이 허드러지게 피어 있는 곳으로 오니 시간이 11시 44분이다. 산길에서 벗어난 오른쪽 돌무더기 쌓인 곳으로 올라가 보따리를 풀었다. (충무김밥 10개와 뜨거운 커피로 나홀로 산상의 만찬을 즐겼다. 그런데 어디서 날라왔는지 똥파리 한 마리가 나를 귀찮게 했다.)

식후 경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흰꽃을 확대시켜 보니 야광나무꽃으로 보인다. 밤을 환하게 밝혀준다는 야광나무 꽃, 주로 북한땅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의 백두대간에 뿌리를 내리고 자생한다. 봄비를 맞으며 다섯 개의 꽃잎을 갖고 네 개 꽃잎의 고광나무와 구별되지만 나는 아직도 꽃잎 개수로 널 알아본다.





12시 28분. 제석봉 정상을 대신하는 안전쉼터다. 1950년대 도벌꾼들이 도벌 흔적을 안 남기려고 불을 질러 울창한 산림이 모두 탔다. 당시 뼈대만 남은 나무는 고사목이 되어 지금가지도 제석봉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제석봉 쉼터에서 내려다본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일대

천왕봉이 날아오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끝내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아 포기하고 돌아선다.



완만한 능선을 20분 정도 내려가니 장터목대피소에 닿는다. 장터목 지명은 옛날 북쪽의 함양 마천면과 남쪽의 산청 시천면 주민이 해마다 봄가을에 올라와 물물교환을 하던 장터에서 유래한다. 하산은 중산리 (5.3km)로 꺾는다. 음수대에 들러 한 모금 마시고 수통의 물을 보충하며 내려가니

'물참대'가 여기저기에 피어있다. 물참대는 주로 산골짝 숲 속, 숲 가장자리 및 그늘이 지고 습기가 있는 계곡이나 전석지 등에서 자라는 나무다. 땅에는 '참꽃마리'도 피어있는데 데리고 오지는 않았다.

'꽃황새냉이'도 많이 보인다. 꽃황새냉이 역시 물가나 습기가 많은 곳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내림길 풍경 (겨울이면 사천 와룡산과 남해도가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급경사길을 쏟아져 내려오니

칼바위 계곡에 놓인 명성교가 나오고

다시 10분이면 병기막터교를 건너 병기막터 쉼터에서 숨을 고른다. (산님 몇 분이 앉아 계심) 칼바위 삼거리까지 3.0km 중산리탐방안내소까지 4.3km 이정표를 보며 아직도 걸어야할 길이 많이 남았다는 것에 마음을 다잡는다.

병기막터 지나 산길에 피어있는 '노린재나무꽃'이다. 물참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이 아이는 수술이 유난히 길어 한 눈에 알아본다.

병기막터에서 15분쯤 걸어오니 유암폭포다. 유암폭포에는 외국인 젊은 커플이 사진을 찍고 있다. 통신골은 이곳에서 장터목대피소 방향 50m정도 이동하여 계곡으로 들어가면 두 갈레 계곡이 나오는데 우측 계곡이 통신골이며 천왕봉으로 오를 수 있다.

유암폭포 앞에 피어있는 층층나무꽃

홈바위교를 건너면서 바라본 지리 주능선 (이곳에서 법천폭포 보러 가고 싶었지만 정확한 들머리를 몰라 포기한다.) 2008년 09 15일 깊은골/법주골 산행시 함께 했던 의령의 솔바우님 인도로 법천폭포를 볼 수 있었다.

2008년 9월 15일 촬영한 법천폭포 창고 사진 (고도 875m)

법천폭포에서 불과 몇 십미터 거리에 있는 출렁다리의 모습이고 출렁다리 아래 계곡이 바로 깊은골 들머리이다. 이리로 들어가 끝까지 오르면 개선문 바로 위로 연결된다. - 2008년 9월 15일 촬영한 창고 사진

유암폭포에서 칼바위삼거리까지는 55분쯤 걸렸다. 칼바위삼거리 바위에 걸터 앉아 목도 축이고 가져간 사과 한 개를 먹으며 쉬었다 간다. (아까 유암폭포의 외국인 젊은 커플도 바위에 걸터 앉아 목을 축이고 있다)

잠시 후 칼바위를 지난다. 칼바위는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지리산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자의 목을 베라고 자객을 보냈다. 자객이 바위틈에서 수행 중인 사람을 발견하고 칼로 내리쳤더니 바위가 쪼개져 홈바위가 되고 칼은 부러져 날아가 꽂힌게 지금의 칼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통천문 출입문을 나와 중산리 야영장에서

새로 만들어 놓은 덱계단길로 내려간다.

오른쪽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면 중산리 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애마가 있는 중산리 주차장까지는 20분을 더 걸어야 한다. (택시를 타려고 했더니 합승이 안 된다고 한다. 올라올 때는 합승했는데)

그래서 핫김에 서방질한다고 그냥 걷기로 했다. 6,000원 아끼려고 20분 동안

20분 후 도착한 중산리 주차장에서 오늘의 지리산행을 모두 마친다. 아직까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지리산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어준 산행이었다. 이런 건강을 주신 돌아가신 부모님과 신께 감사드린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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