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기

연길 백두산 서파/북파 Day3,4

통영사람 이수영 2019. 8. 1. 06:40

Day3-7월 27일(토)
Day4-7월 28일(일)
(이도백화~북파산문~연길~도문~연길~김해)
 

-3박 4일 일정-
*제1일(목) 김해-연길(1박)
*제2일(금) 연길-서파산문-이도백화(2박)
*제3일(토) 이도백화-북파산문-연길(3박)
*제4일(일) 연길-도문-연길-김해

 

백두산 지도
 

27일 이동궤적
이도백하-북파산문-장백폭포-이도백하-용정-연길 순
 

이도백하 일산일람호텔 전경
 
어젯밤 피곤했던지 05시 모닝콜 소리에 눈을 떴다. 호텔 밖으로 나가 위 사진 한 장 찍는데 오늘은 날씨가 매우 좋다. 06시 식당에서 뷔페를 먹었는데 맛이 되게 없어 대충 먹고 06시 38분. 미니버스를 타고 북파산문으로 향했다. 이렇게 일찍 서두는 이유는 이렇게 출발하지 않으면 구름 인파 때문에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가이드 김길룡 말에 의하면 오늘이 토요일이라 북파 예약자가 16,000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도백하 일산일람호텔 로비
 

북파산문으로 가는 길에 차가 막혀 무슨 일인가 했더니 아침부터 음주체크를 하는 중이란다.
 

07시 26분. 버스주차장에 도착하니 벌써부터 많은 버스와 인파로 북적인다. 화장실 부터 다녀온 후 줄을 섰는데 이미 구름 인파다.
 

이곳까지 오는데 세군데나 줄을 서서 통과해야 했다. 장백산 간판이 보이는 건물이 셔틀버스 대합실이고 이곳에서 여권과 티켓을 제시하면 비로소 셔틀버스를 탈 수 있다. 30년 전 약사 동료들과 이곳 북파산문으로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는 이런 건물도 없었고 일제 지프차를 대절해서 바로 올랐던 시절은 이제 호랑이 담배 먹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셔틀버스를 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고 셔틀버스를 타고 20분쯤 달리면 
 

빵차를 탈 수 있는 정류장에 도착하는데 빵차를 타기 위해 또 줄을 서야 하니 한마디로 고역이 따로없다. 참고로 빵차란 차의 모양이 식빵처럼 생겼다하여 빵차라 불린다. 8시 21분에서야 빵차에 올라탄다.
 

달리는 빵차에서 촬영한 북파산문 오름길
 

북파를 오르내리는 빵차는 300여대나 된다고 한다. 이 빵차를 타면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지그재그 길이라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를 반복한다) 오름길 초원에는 노란색 꽃들이 피어있는데 '두메양귀비' 다.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는 두매양귀비를 보노라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빵차를 타고 15분 정도 올라오니 멋진 기상대 건물이 보이는 북파산문이다. 가이드 김길룡의 말에 의하면 이곳 기상대에서 평생을 근무했던 분이 계셨는데 사망 후 이곳 어딘가에 묻혔다고 한다. 그분이야 말로 정말 뼈를 묻었다는 말이 실감난다. 기상대에서 A코스와 B코스로 나누어 지는데 우린 우측으로 올라가는 A코스를 택했다. 즉, 천지를 중심으로 우측에서 좌측으로 반시계방향으로 돌고 내려오는 코스다. 사진속 줄지어 올라가는 구름 인파를 한번 보시라 이것이 현 백두산 북파산문의 실상이다.
 

아까 오름길에서 차창으로 보았던 두메양귀비다. 가까이 가서 근접 촬영을 하고 싶었지만 트레일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철두철미하게 단속하는 감시요원 바람에 다가갈 수 없다. 너무나 많은 인파가 몰려오니 트레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단속하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니 이게 뭐지? 싶다.
 

뒤돌아본 북파산문
 

두메양귀비와 바위구절초가 함께 피어있다.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올랐다. 천지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주변 환경과 그새 중늙은이로 변한 나의 모습은 너무나 많이 변했다. 내가 처음 천지를 만났던 30년 전 그 날의 감동, 그 벅찬 감동은 어디로 갔을까?
 

촬영: 정연국
 

어느 전망대에서 있었던 중국에서만 통할 수 있는 여담을 소개한다.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입장하고 있어 들어갔더니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는 곳이었다. 그들의 즉석 사진은 필요없어 돈 천원을 내밀며 내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더니 대뜸 하는 말이 "안 돼"(한국말로) 하며 큰소리를 치고 쫓아낸다.
 
지구상 이런 나라가 있는가? 전망대가 그들의 개인 소유지도 아닌데 쫓아내는 불법을 자행하고도 당연한 표정을 짓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정말 기분이 나빴다. 그랬다 백두산은 이미 조선의 백두산이 아닌 중국의 장백산이었던 것이다. 내 다시는 중국 땅에서 천지를 밟지 않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관광객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올라온다. 이들 중에는 간혹 한국인도 있지만 대다수가 중국인들이다. 중국에는 더 높고 아름다운 산이 수두룩한데도 이렇게 많이 오는 까닭은 주로 남쪽 지방의 사람들이 이곳(북쪽)을 많이 찾으며 천지가 세계에서 가장 큰 화산 분화구이며 큰 화산 호수이기 때문이란다.
 

중간에 길이 보이고 길의 좌측 봉우리가 장군봉(2,750m)으로 최고봉이며 북한 영토에 속한다. 북의 김정은 위원장과 남의 문재인 대통령이 두 손을 맞잡고 올랐던 곳이다. 그렇게 다정하더니 요즘은 온갖 욕설을 내뱉는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의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꿀 먹은 벙어리인양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있으니..
 

이렇게 반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고 북파등정을 마쳤다. 다시 빵차 타고~다시 셔틀버스 타고 장백폭포로 향한다.
 

천지 만큼은 아니지만 이곳도 사람들이 많다. 데크 트레일을 따라 계속 올라가야 한다.
 

저 멀리 흰 물줄기를 내뿜는 장백폭포가 보인다. 
 

함께한 일행들 (촬영: 김길룡 가이드)
 

촬영: 아내
 
가이드 김길룡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트레킹을 하며 장백폭포로 내려왔는데 지금은 봉쇄되었다고 한다. 봉쇄를 한 이유가  흥미로운데 우리나라 1박 2일 팀이 들어와서 천지에 태극기를 꽂는 만행(중국의 입장)을 보고 나서는 트레킹을 금지 시켰다고 한다. 물론 천지에 태극기를 꽂은 1박 2일 팀의 행동은 과한 행동이었지만 그랬다고 트레킹 금지라니 과시 사회주의 나라 중국답다.
 

폭포구경을 마치고 돌아가는 산길 코스에는 이름모를 곰취류가 산상의 화원을 이루고 있다.
 

하산 트레일은 온천지구로 연결된다.
 

끓고 있는 온천수의 온도는 85도에 육박한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65도 정도였다는데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온천수의 온도가 높아 진다고 하니 언젠가는 백두산 대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폭포관광을 마치고 내려오니 김길룡이 온천수에 삶은 달걀을 내민다. 30년 전 온천수에 직접 달걀을 넣어 삶아주던 그 모습이 지금도 선한데 지금은 아예 건물 안에서 삶은 달걀을 판매하니 그 멋이 사라진 느낌이다. 삶은 계란은 채 익지 않아 반숙 상태다. 이곳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25분 이동하여 우리버스로 옮겨 타고 다시 35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상호도 없는 식당인데 홀이 무척 넓고 다른 물품도 판매하는 곳이었다. 음식 맛도 별로고 안이 더워서 대충 먹고 나왔다. (시간에 쫓기는지 음주는 자제하라고 김길룡이 말했지만 이번 팀은 주님 모시지 않는 날이 없었다. 얻어만 먹기 민망해 빙천맥주 3병을 계산했는데 한국과 똑 같이 한 병에 4,000원이다.)
 

중식 후 버스는 논스톱으로 용정까지 내달렸다. 용정에 들린 이유는 쇼핑 때문이다. 원치 않았지만 여행 상품에 쇼핑 2회가 들어 있었다. 내일 한 군데 하기로 하고 오늘은 라텍스 한 군데만 방문했다. 마침 일행 중 한 분이 알레르망(신상) 또 다른 일행들이 베개를 구입하는 바람에 우리는 구경만 하면 되었다.
 

쇼핑센터 방문을 마치고 연길로 돌아와서 들린 곳은 북한 음식점 유경식당이다. 솔직히 정은이 때문에 와서는 안 될것 같은데 우리 부부만 빠질 수도 없다.
 

일전에 캄보디아 평량랭면관에 한 번 간적이 있어 이곳 유경식당과 비교하자면 음식은 유경식당이 훨씬 낫고 공연은 캄보디아 평량랭면관이 훨씬 낫다. 이곳 유경식당의 무대는 캄보디아 평량랭면관에 비해 형편없이 작고 공연자의 실력도 낮았다. 보통 30분 공연한다는데 이날은 추가공연까지 해서 40분 정도 공연했다. 이곳에서 난생 처음 대동강맥주와 들쭉술을 맛보았는데 그 맛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했다. (블루베리로 만들었다는 들쭉술은 도수가 35도인데도 독한 줄 모르겠다)
 

유경식당을 나서며 청풍명월회 회장님과 함께
 
청풍명월은 부부로 구성된 이 팀의 회 이름인데 회장과 총무가 남편들이 아닌 아내들인 것이 재밌다.
 
석식후
 
첫날에  묵었던 동북아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하자 김길룡의 처와 아들이 오늘로 작별을 고한다고 해서 아이 용돈 하라며 몇 푼 주었다. 1008호실에 여장을 풀었고 커피 한 잔 마신 후 소화도 시킬 겸 산책길에 나섰다.
 

큰 강이 보이고 강변을 따라 산책길이 잘 나있다. 안내판에는 '병하공원'이라 적혀있다. 그렇다면 이 강이 병하(兵河) 인가 보다.
 

강폭이 넓고 물살도 세다.
 

이곳을 돌면서 새삼 연길시의 높은 경제 수준을 느낄 수 있었다. 30년 만에 다시 본 연길시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아파트를 아빠트라 적고 러시아를 로씨아 라고 적은 것이 여기가 한국이 아닌 중국인 것을 실감케 한다. 산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샤워 마치고 침대에 누워 인터넷을 하는데 잠이 쏟아져 견딜 수 없다. 몇 시에 잔줄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마지막날 (28일)

마지막날 28일 이동궤적
호텔-죽섬유쇼핑센터-도문-랭면집-농협상점-공항 순
 

연길 죽섬유 쇼핑센터
 
꿈에서 깨어났더니 아내가 먼저 눈을 뜨고 있어 몇 시냐고 물으니 다섯시 반이라 한다. 곧 모닝콜이 울리고 6시 호텔에서 아침(뷔페)을 먹은 후 6시 46분. 동북아호텔을 떠나 도착한 곳은 쇼핑센터였다. 키가 작은 부산 출신의 하씨 성을 가진 이가 열강을 하는데 내 눈에 드는 것은 그이가 차고 있는 악어벨트다. 1시간 정도 머물면서 저렴한 제품 몇 가지를 샀고 쇼핑을 마친 후 북한의 남양시와 국경을 맞대는 도문시로 이동했다. (연길에서 1시간 걸림)
 

도문에 오니 시민들이 단체 체조를 하고 있다.
 

널따란 광장으로 왔다.
 

가수 고 김정구님의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두만강이다. 그런데 그 가사에 나오는 두만강 푸른물이 아닌 두만강 흙탕물이 거세게 흘러가고 있다. 이렇게 유속이 빠르면 도강으로 탈북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 것 같다. 김길룡의 말에 의하면 북한 측에서 수문을 열어 이렇게 물살이 세다고 한다.
 

강의 건너편에 보이는 도시가 북한의 남양시인데 한눈에 봐도 중국 도문시에 비해 무척 초라하다.
 

단체 촬영: 김길룡
 

이곳에서 뗏목을 탔다.
 

말이 뗏목이지 모터가 달린 보트다. 계림에서 보았던 바로 그 뗏목보트다.
 

그러니 시끄럽고 운치가 없어 좀 그랬지만 휙~한 바퀴 돌기에는 제격이다. 우선 시원해서 좋다. 아내와 나 하희봉 후배님 부부, 임재호 후배님 부인인 김미연님과 함께 탔다. (승선 인원이 5명임)
 

이렇게 한 바퀴 휙 도니 허무하게 끝이 난다. (20분 소요)
 

선착장에서 말린 명태와 막걸리를 팔았는데 김길룡이 쐈다. 그런데 막걸리 맛은 이상하리만큼 닝숭한 맛인데 말린 명태는 기가찬다. 막걸리 마시고 트림이 나지 않는 막걸리는 이 막걸리가 처음이다. (아마도 물을 많이 탄 듯)
 

스마트폰으로 당겨서 본 북한 남양시 건물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이 사진은 트리밍한 사진이라 실제 보다 가깝게 보이지만 더 먼 거리에 있다. 선착장에서 나와 두만강에 손을 담구는 아내, 그러자 정연국 후배님 부인도 덩달아 탁한 두만강에 손을 담군다.
 

 

촬영: 어느 이름모를 중국인
 

연길로 돌아가면서 버스 차창으로 바라본 도문 버스역
 

연길에서의 마지막 식사 (냉면과 찹쌀탕수육 먹음)
청풍명월 회장님이 아내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저렇게 다정할 수가!
 
중식 후
 
바로 공항으로 가지 않고 김길룡 친구가 운영하는 농협가게에 들러 길룡의 체면을 세워 주었다. 이 바람에 공항에서 약간의 헤프닝이 있었으니 무신 놈의 항공사가 그리도 빨리 비행기를 타라고 하는지 원.. 아무리 급해도 비울 것은 비우고 타야지 이렇게 사람의 혼을 빼는 항공사는 난생 처음이었다. 올 때도 빨리 출발하더니 갈때도 빨리 출발했다.
 

아듀~연길 아듀~백두산
 
내 인생 두 번 다시는
 
중국을 경유하는 백두산 탐방은 없을 것이다.  30년 전에 올랐던 천지를 재확인하고 싶었던 여정이었다. 하지만 30년이 흐른 오늘의 백두산은 더 이상 그날(30년 전)의 백두산이 아니었다.
 
함께 3박 4일 동안 동고동락한 청풍명월 회원님들께 감사드리며 이 여정을 할 수 있게 소개해 준 진주비경 정대장께도 감사드린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