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산 산행차 찾은 장수읍 남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을 산책했습니다.
산책시간: 10시 05분~10시 30분 (25분 동안)
▷ 논개사당 입구 안내판 <10:05>
장수삼절(長水三節)로 알려진 논개는 조선 중기의 의기(義妓)로, 진주병사 최경회(崔慶會)의 사랑을 받았다 한다.
임진왜란 때 끝까지 저항하던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들은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기생으로서 그 자리에 참석한 논개는 성의 함락과 군관민의 죽음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바위 위로 유혹해 껴안은 채 남강 아래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가 뛰어내린 바위를 훗날 의암이라 하였다. 지금 사당을 의암사라 부르는 연유이다.
조선 헌종 12년(1846)에 현감으로 장수에 온 정주석(鄭胄錫)은 이 곳이 논개가 자란 고장임을 기념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세웠는데, 사당 건립 당시 발굴되어 경내에 옮겨져 있다.
▷ 논개사당 입구에 있는 소나무 <10:09>
지금의 사당은 1956년에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호남삼강록(湖南三岡錄)·의암주논개사적비 등
사실(史實)에 근거하여 장수군내 각계 인사가 성금을 모아 건립을 추진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가 여러가지 고서와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하여 그린 영정을 봉안하고,
의암사(義岩祠)라는 당시 부통령 함태영(咸台永)의 친필 휘호로 현판을 각자하여 걸었다.
그 후 1960년대 후반부터 의암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전체 2만 여 평에 이르는 대지를 조성하여 사우(祠宇)를 이건(移建)하였다.
▷ 소나무꽃 (암꽃) <10:09>
▷ 논개사당에서 만난 다람쥐 (잠시 포즈를 취해 주다가 달아났다.) <10:14>
▷ 영정을 모신 義巖祠로 들어가는 忠義門 <10:16>
구조는 삼문 안의 안마당과 중문으로 막은 사당의 두 영역으로 나누어 층을 이룬다.
삼문 좌우로 사당채 뒤까지 담을 두르고, 중문 좌우에서 역시 담을 둘러 영역을 확연히 구분하였다.
조성은 안마당 영역을 지면보다 한층 높게 마련하였으며, 사당 영역은 안마당에서 다시 층계를 오른 후
중문을 통해 들어가게 하였다. 묘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의암사가 창건된 후에 장수군은
매년 9월 9일을 택하여 논개제전을 열다가 1968년부터는 장수군민의 날로 지정하고,
군민의 날 행사와 겸하여 대제(大祭)를 지내고 있다.
▷ 의암 주논개 영정 <10:17>
짧은 삶, 기구한 여인의 운명 ‘논개(論介)’
특이한 사주를 타고난 소녀 '논개' ‘논개 부인’ 주 논개(朱 論介)는 동양성리학(東洋性理學)의 시조라 이르는
주부자(朱夫子) 주문공(朱文公) 희(憙)의 후예들이 모여살던 신안주씨(新安朱氏)의 집성촌인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서당 훈장인 주달문과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논개의 조부는 주촌마을에 학당을 차리고 아동들을 훈육하는 훈장을 지냈는데 논개의 아버지 달문 (達文)은
부친의 대를 이어 훈장으로 가업을 삼았던 것이다. 달문 (達文)은 밀양박씨(密陽朴氏) 가문의 규수에게 장가들어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아들을 얻어 대룡이라 이름짓고 귀하게 길렀으나 나이 15세에 괴질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후사가 없는 주달문 부부는 명산 장안산(長安山)에 들어가 정성껏 기도를 드리고 주씨 가문에 대를 이어갈 자손을
점지해 줄 것을 천지신명에게 빌었으며 그 보람이 있어 박씨부인의 나이 40중년에 태기를 느껴 무척 기뻐하였다.
1574년(선조 7년) 9월 3일 박씨부인은 산기를 느껴 분만준비를 하였으며 밤 술시(戌時)에 여아를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아동을 가르치던 주달문에게 여아의 출생을 전달한 사람은 주달문의 아우 주달무(朱達武)였다.
주달문은 몇 손가락을 꼽아보고서 매우 기이한 일이로다. 기이한 일이다 하면서 내실로 들어갔다.
산모는 여아를 출산하고서 매우 실망하고 있었다.
남편 주달문은 실의에 빠져 있는 부인을 위로하여 “비록 여아를 분만하였으나 아이의 사주가 아주 기이하오.
갑술(甲戌)년 갑술(甲戌)월 갑술(甲戌)일 갑술(甲戌)시에 태어나 사갑술(四甲戌)의 특이한 사주를 타고 났소.
장차 큰일을 성취할 것이며 높은 명성을 얻을 것이나 우리 부부 나이 늙어 대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 한스러울 뿐이요” 라고 위로하였다.
아버지 주달문은 딸에게 사갑술의 뜻을 새겨, 개해, 개달, 개날, 개시라면 개를 낳는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경상도 방언(方言)으로 개를 놓다 (개를 낳다)라는 뜻이 담긴 논개(論介)라는 이름을 주었다.
자라면서 아동교육의 여가를 틈타 한문과 예도(禮道)를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이 어린 논개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가지를 이해하는 비범한 지혜가 있어 아버지 주달문을 기쁘게 하며 놀라게 하였다.
논개 나이 10여세가 되니 천성이 아름다움과 고상한 기풍을 갖추게 되었는데 효심 또한 지극하여
새벽 문안부터 밤의 잠자리에 이르기 까지 보살핌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산딸기 한알, 산나물 풀 한포기라도
아버지 어머님의 식탁에 올려 부모의 즐거움을 더해 주는 것이 논개소녀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그러나 1587년(선조 20년) 겨울 내 병석에 누웠던 아버지 주달문은 병세가 악화되어 논개소녀의 지극한 정성에도
회복하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논개소녀의 불행이 시작된 것이 바로 이 때 부터이다.
숙부 주달무의 간계
주색잡기와 행패를 일삼고 다니던 논개소녀의 숙부 주달무는 당시 지방의 토호 김풍헌(金風憲)을 찾아가
형의 유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체하며 자신의 행락의 자금을 마련하여 하였다. 그러나 간교한 김풍헌은
주달무의 방탕함을 이용하여 백치불구(白痴不具)인 자식의 민며느리로 논개를 사올 것을 계획하였으니
두 사람의 흥정은 쉽게 성립되었을 것이다.
김풍헌은 행락자금이 필요한 주달무를 설복시켜 동네앞 상답(上畓) 세마지기(三斗落)의 문서와 엽전 300냥,
당백포(唐白布) 세 필에다 김풍헌의 아들 사주단자(四柱單子)를 얻어가지고돌아간 주달무는 그 돈을 주색잡기에
탕진할 때까지 주촌 마을에 돌아가지 않았다. 김풍헌의 추궁과 재촉에 못이긴 주달무는 마침내
형수 박씨부인 앞에 나타나 김풍헌의 아들 사주단자를 내던지고 행방을 감추고 말았다.
김풍헌은 황도길일을 택하여 혼례일(婚禮日)을 정하고 박씨부인에게 전달하게 되자 박씨부인과 논개 소녀는
혼비백산의 청천벽력이 떨어지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모녀간은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을 피하기 위하여
박씨 부인의 친정인 안의현 서하면 봉정 마을로 피신하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었다.
가마와 시종들을 주촌 마을에 보내서 민며느리로 샀다고 생각하는 논개소녀를 데리러 갔으나 허탕치고 돌아오자
김풍헌은 노발대발하여 소장(訴狀)을 만들어 장수현감에게 제출하고 엄벌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1588년(선조 21연) 8월 장수읍 관아(官衙) 소선루(笑仙樓) 앞 뜰에는 안의현에서 포졸에게 잡혀온 박씨부인과
논개소녀가 부복하고 있으며 김풍헌과 여러 증인이 현감 최경회(崔慶會)의 사건심문을 받고 있었다.
심리가 끝나고 판결에서 최경희 현감은 김풍헌에게 무고한 사람을 무고(誣告)해서 괴롭히는 처사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 는 엄명을 내리고서 박씨 부인과 논개소녀를 무죄방면의 영을 내렸다.
최경회(崔慶會)현감의 부인 나주김씨(羅州金氏)는 내아(內衙)에서 이 송사(訟事)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방명된 모녀를 내아에 불러 그 억울한 사정을 듣고서 의지할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모녀를 내아에 머물면서
병약하여 자리에만 누워있는 자신의 시중을 들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모녀는 최현감의 현명한 판결로 무죄방면된 은혜를 보답하고 우선 갈 곳도 없는 처지라 최경회 현감의 승낙을
얻어 내아에 머물면서 현감 부인의 병시중을 들게 되었다. 정성을 다해 부인의 병 수발을 하고
최현감의 시중을 드는 논개의 모습에 감동을 한 김씨 부인은 부군 최경회 현감에게 생명을 오래 유지하지 못할
자신을 대신해서 측실(側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현감 최경회와 혼인, ‘논개 부인’이 되다
곧 이어 논개의 어머니 박씨 부인도 서하의 친정에서 사망하고 최현감의 부인 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는 고아나 다름없는 논개 소녀에게는 의지 할 곳은 최현감 밖에 없었다.
1591년(선조 24년)의 봄, 논개는 최경회(崔慶會)현감의 측실이 되어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도 깨이기 전인 1592년(선조 25년) 4월 14일 부산포에 가등청정(加藤請正),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주축으로 왜군의 침략이 시작되어 이른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하였다.
최경회 현감은 소수의 관군을 이끌고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광(李洸)이 영도하는 전라도구원군(全羅道救援軍)에
편성되어 수원의 독성(禿城)까지 진군하였으나 이광은 유능한 장재(將材)인 황진, 정담, 최경회, 권율 등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급수로(汲水路)가 없는 산성인 독성에 주력부대를 포진시켰다가 왜군의 예봉에 궤멸되고 말았다.
나주목사(羅州牧使) 권율과 최경회 정담 황진 등이 인솔한 소수의 병력만이 무사하게 귀향할 수 있었다.
뒤이어 조정에서는 권율목사의 장재를 인정하여 호남도원수(湖南都元帥)를 제수 하였으며 전라감사도 겸직하게 하였다.
권율도원수는 병력을 재배치하여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을 진산이치(珍山梨峙)에 김제군수(金題郡守) 정담을
용담현(龍潭縣)에 의병장 최경회를 장수(長水)에 배치하고 물밀 듯이 밀려오는 왜군을 방어하게 하였다.
최경회 현감은 장수현임현내면월강리(長水縣任縣內面月岡里) 앞 구릉(丘稜)에 장대를 설치하고
의병초모(義兵招募)에 힘을 기우려 장수 진안 무주 등지에서 약 5000명의 장정을 초모할 수가 있었고
장대 앞 넓은 들판을 조련장(調練場)으로 이용하여 막강한 군대를 조련하였다.
논개 부인 역시 의병들의 보살핌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련을 마친 의병장(義兵將) 최경회는 근거지를 난공불락의 요새인 무주 적장산성(赤掌山城)으로 본부를 옮기고
무주 금산 경상도 지례(知禮) 진양 개령 산청등지에서 왜적을 격파, 큰 무공을 세웠다.
당시 경상감사(慶尙監司) 김성일(金誠一)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今此晉陽之捷 莫非崔慶會外援之力 : 이번 진양의 승전은 최경회의 외부 원조의 힘이 아니라 할 수 없다 하였으니
선조 임금께서는 무한히 칭찬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영전시키고
영지인 진주성(晉州城)에 입성시키고 국토의 서남방을 방어케 하였다.
부군을 따라 진주성에 가다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된 최경회(崔慶會) 장군은 수하 의병중에서 약 3,000명을 휘하에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였으며 논개 부인은 수일후에 몇사람의 호위 병사와 같이 풍천마을에서 말안장에 올라
300리 진주길을 떠났다.
논개 부인은 봉정마을 외가(外家)에서 일박을 하고 다시 노정을 재촉하던 중 산청현 오부면(山淸縣梧釜面) 부근에서
왜적의 척후병에 걸려 사로잡히게 되었다. 왜병들은 이 부인이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의 부인인 것을 알고서
재를 넘어 왜군의 본거지인 창원(昌原) 근방으로 압송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진주성의 중요성을 강조, 섬진강을 지키던 방어사(防禦使) 김천일(金千鎰), 복수장(復 將)
고종후(高從厚)를 진주성에 입성케 하였다. 또한 왜적을 추적하여 경상도 상주적암(尙州赤岩)까지 진출한
충청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장군에게도 진주성 방어명령을 내렸다.
이들이 명령을 받고 진주성으로 진격하던 중, 마침 산청현 오부면을 지나게 되었는데,
부상당한 병사로 부터 왜군에게 논개부인이 붙들려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어 이를 추격,
함안 현양곡(咸安縣陽谷)에서 극적으로 구출하고 함께 무사히 진주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논개부인이 진주성에 입성한 후 2개월도 안되는 6월이 되자 운명의 결전의 날이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침략에 나선 가등청정(加藤淸正)과 소서행장(小西行長)은 그때까지 함락시키지 못했던
진주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용장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를 공성장으로 선정하고 20만 병력을 주어 철통같이
진주성을 에워싸고 주야로 쉴새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이때가 1593년 6월 18일이었으며 때마침 장마철에 접어들어 남쪽에서 몰려든 검은 구름은 천지를 어둡게 하면서
놋낮같은 빗줄기를 퍼붓기 시작하였고 지루한 장마로 변하고 말았다. 논개부인은 낭자군(娘子軍)을 조직하여
치마폭에 돌멩이를 나르고 가마솥에 뜨거운 물을 끓여 성벽을 기어 오르는 적병에게 퍼붓는 전쟁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장마비에 견디지 못한 성첩의 동남각이 무너진 것이 6월 28일 황진장군의 영웅적인 싸움으로 적을 막으며
성첩이 보수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일대의 명장 황진장군은 적의 조총탄이 이마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으며
6월 29일 밤 다시 서남방의 성첩 20여장(丈)이 무너지면서 왜적이 개미떼처럼 넘어 들어와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잔인한 왜적들은 조선 방어군과 무장하지 않은 백성을 합하여 6만명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왜장 껴안고 남강물에 떨어져 남편 최경회의 넋을 달래다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이종인 장윤 등은 남장대(南將臺) 촉석루(矗石樓)에 모여
국토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할 것을 협의하고 최경회 장군의 임종시(臨終詩)를 읊으며
차례로 남강물에 뛰어들어 순절하였다.
논개 부인은 성이 함락되고 최장군 마저 순절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무한히 비분 강개 하였다.
성을 함락시킨 왜적들은 살육과 약탈을 일삼다가 7월 7일을 기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베풀고자
기생을 소집하는 방이 거리에 붙었으니 이를 본 논개 부인이 이것이야 말로 하늘이 주신 설욕의 기회라 생각하고
진주고을 수안기생(首案妓生)을 불러 자신의 계획을 말하고 기안(妓案)에 논개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였으니
바로 이때부터 비장한 각오가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칠석날은 왔고 공성에 참가했던 왜장들이 촉석루에 모여 들었다. 논개 부인은 어여쁘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운명의 연회석에 참석 하였다. 장수지(長水誌) 건권(乾卷) 절의장(節義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崔公以晉州兵使 當壬辰亂詩 論介隨去及城陷 盛장粧 수誘敵將對舞於 南江危岩之上因以同墮江而死後人
其岩 曰義妓岩 立祠江上而祭之 : 최공이 진주병사로 임진란을 당하였을 때 논개는 공을 따라 갔더라.
성이 함락함에 이르러 어여쁘게 치장하고 적장을 꾀어 남강의 위태로운 바위에서 춤을 추다가 같이 물에 떨어져
죽었다. 뒷 사람이 그 바위에 새겨 의기암이라 이르더라. 강상에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노라.
논개 부인은 진주 기생들의 협조를 얻어 공성의 주장 게야무라 로구스게(毛谷村六助)에게 접근할 수 있었으며
승전에 도취하여 방자하고 교만한 게야무라를 혼몽대취 하도록 술을 권한 뒤 추파를 던져 연석에서 빠져나와
남강 기슭에 있는 위태로운 바위까지 유인하는데 성공하였다.
춤을 추며 애교로써 포옹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여 강물속으로 밀어 같이 떨어졌으니 10여일간을 쉴새없이 내린
장마비는 남가의 물을 노도와 같이 흐르게 하였으니 홍수에 휘말린 논개부인과 게야무라 는
껴안은채 한없이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20살 꽃다운 청춘의 최후가 어찌 비참하지 않으랴!
게야무라는 산골 출신으로 물에 들어가 수영해 본 일이 없는 ‘맥줏병’이었다.
그런 데다 술에 취해있어 논개의 팔을 뿌리칠 수 없었다. ‘
임진록’에 의하면 그가 물 속에서 열 번이나 떠올랐으나 기어이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최경희 장군을 따라 진주성에 가서 용감하게 싸운 장수 의병들은 성이 함락되면서 약 1천명이 야음을 틈타
진주성을 탈출하여 부근 산간에 숨어 유격전을 벌이던 중 제장의 죽음과 논개 부인의 장열한 설욕의 순절을
탐지하고 시신이라도 수습하려는 충정에서 남강 하류의 수색작업을 개시하였다.
창원 지수목에서 최장군의 시체와 떠내려온 논개 부인의 시신을 발견하기에 이르러 장장 150리길을 운상하여
삼남대로(三南大路)변 양지바른 언덕에 (현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산 31번지) 최경회 장군을 위쪽에
논개 부인을 아래쪽에 장사 지냈다.
-himammo님의 글에서 발췌-
▷ 忠義門에서 내려다 본 입구 <10:18>
▷ 논개사당에 피어있는 목단꽃 <10:28>
▷ 다시 돌아온 논개사당 입구 <10:30>